007 스카이폴(2012) - 불필요했던 본드의 가족사

  007 시리즈는 20번째 작품 어나더데이에 이르러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분명 흥행 면에서는 전작들 못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문제는 영화의 내용이 너무 부실했다는 점이었다. 어찌되었든 흥행에는 성공했기에 시리즈를 이어나가는데 무리는 없었지만, 007 시리즈를 거의 가업으로 여기는 브로콜리 가문의 입장으로서는 어나더데이의 혹평을 보며 뭔가 변환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인지, 시리즈의 리부트를 결정한다.

 

  이러한 리부트 결정 이후 모습을 드러낸 첫 번째 007 시리즈 카지노 로얄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007의 모습을 보여주며 007 시리즈를 부활시키는데 성공했다. 카지노 로얄이 성공할 수 있었던 까닭은 007 본연의 성격을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도 50년이나 지속되면서 고착화된 007의 클리셰를 비틀어버렸기 때문이다. 카지노 로얄은 관객과 평단 모두에게 호평을 받았고, 007의 새로운 팬층을 만들어내었다. 그 결과, 카지노 로얄과 내용 면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작품인 퀀텀 오브 솔러스는 2008년 최고의 기대작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2008년 최고의 기대작 중 하나였던 퀀텀 오브 솔러스는 예상과는 달리 극과 극을 달리는 평을 받았다. 작품 자체는 매끈하게 잘 빠진 편이었지만, 카지노 로얄에서 보여주었던 시리즈를 뒤집는 파격에만 초점을 맞추다보니 007 본연의 매력을 잃었다는 평이 많았고, 무엇보다도 이야기의 짜임새가 카지노 로얄보다는 떨어졌던 것이다.

 

  퀀텀 오브 솔러스의 예상 외의 혹평은 007 시리즈에게 어떻게 하면 카지노 로얄 때처럼 전통과 변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과제를 남기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퀀텀 오브 솔러스로부터 4년 후인 2012년 007의 23번째 작품, 스카이폴이 개봉한다.

  우선 카지노 로얄 이후 호평을 받아온 호쾌한 액션씬은 스카이폴에서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이러한 액션씬은 카지노 로얄 때부터 본 시리즈를 연상시킨다는 지적을 받아왔지만, 아무래도 새로운 007 시리즈를 상징하는 요소이기도 했기 때문에 쉽게 버리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카지노 로얄 때부터 등장한 호쾌한 액션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비판보다는 호평이 우세했던 지라, 이 부분은 그대로 밀고나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액션과는 달리 스카이폴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과거의 007 시리즈를 아우르고 있다. 물론 스카이폴은 과거 007의 분위기를 그대로 가져오지는 않았다. 스카이폴이 과거 007의 모습을 받아들인건,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단단하게 구축된 007 시리즈의 세계관이다.

 

  제임스 본드는 스카이폴에서 그저 한 때 화려한 과거를 보냈던 퇴물 정도의 취급을 받는다. 실제로도 부상을 입고 한동안 임무에 투입되지 않았던 제임스 본드는 체력 테스트에도 합격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작중의 인물들은 이러한 제임스 본드의 모습을 보며 그동안 쌓아왔던 007의 세계관을 부정한다. 본드는 시종일관 실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조롱을 받고, M은 청문회에 끌려나가 요즘 세상에 007과 같은 요원이 필요하냐는 질문마저 듣게 된다. 리부트 이후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Q는 볼펜 폭탄 같은 건 과거의 유산이라며 007의 세계관을 조롱한다. Q가 이러한 말을 내뱉는 장면은 작중에서 코믹한 장면으로 여겨지긴 하지만, 오랜 세월 007을 봐온 팬층이라면 결국 007 본연의 모습을 상당 부분 파괴하고나서야 부활한 007 시리즈의 모습 때문에 단순히 가벼운 말로만 여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퇴물들은 여기서 그대로 주저앉지 않는다. 본드는 비록 몸은 예전같지 않지만, 그동안 쌓아온 관록으로 싸움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나간다. 본드는 이를 통해 자신은 분명 과거의 유산일지 모르나, 여전히 유능한 요원이라는 걸 증명한다. 이는 스카이폴의 본드걸이라 불릴 정도로 비중이 급상승한 M 역시 마찬가지다. M은 시리즈 초유의 MI-6 본부 테러로 인해 시작과 동시에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M을 증오하는 범인은 점차 M을 조여들어오고, 정부에서는 본부를 지키지 못한 책임을 물어 M을 끌어내리려 한다. 그러나 M은 이 때, 한 편의 시로써 자신들이 쌓아온 세월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걸 보여준다.

 

  과거의 유산, 이제는 필요없는 퇴물이라 여겨지는 본드와 M이 악착같이 싸워서 자신들의 과거가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모습은, 50년을 이어온 전통의 품격마저 느껴진다. 아마 오랜 007 팬이라면 007 시리즈 특유의 오프닝 음악과 함께 등장하는 구시대의 본드카, 애스턴 마틴의 모습에 전율이 흘렀으리라. 이렇듯 스카이폴의 감정선은 상당 부분 50년 동안 구축된 007의 세계관에 기대고 있다. 오랜 세월 지속되어온 시리즈에서만 보여줄 수 있는 요소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영화를 더욱 짜임새 있게 만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리즈 50년을 기념하는 작품이기에 너무 욕심을 부린 탓일까? 스카이폴은 본드와 M이 애스턴 마틴을 타고 스코틀랜드로 향하는 작중에서 최고로 극적인 지점에서부터 엉뚱한 노선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본드와 M이 굳이 결전의 장소로 스코틀랜드를 택한 것도 개연성이 없었는데, 여기서 갑자기 본드의 가족사가 흘러나온 것이다. 스카이폴은 앞서 언급한 과거 007 시리즈에 대한 향수 못지 않게 본드와 M의 유사가족적인 관계에도 높은 비중을 두었다. 그리고 적어도 영화 중반부까지는 이 두 가지 지점이 잘 맞아떨어졌다. 그러나 본드의 가족사가 등장하면서 이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본드의 가족사가 나왔다는 사실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팬의 입장에서는 좀처럼 언급되지 않았던 본드의 과거가 등장했다는 것 때문에 오히려 흥미로웠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본드의 가족사가 이렇다 할 복선없이 갑자기 등장했다는 점이다. 그런 데다가 본드의 가족사는 맨 처음 등장했을 때의 충격에 비하면, 스토리 상의 비중도 그리 높지 않았다.

 

  본드와 M이 굳이 스코틀랜드로 향한 이유는 본드의 가족사를 보여주고 본드와 M의 유사가족적인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영화 상에 드러난 본드의 가족사는 굳이 스코틀랜드로 올 필요 없이, 본드의 몇 마디 말이면 설명될 정도로 비중이 높지 않았다.  

  스코틀랜드로 가기 전까지 스카이폴은 분명 현대 도시를 배경으로 한 블록버스터였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로 떠난 이후의 분위기는 차분한 느낌의 서부극을 연상시킨다. 실제로 스코틀랜드로 도착한 후부터 스카이폴의 전개속도는 초중반부에 비하면 상당히 느려졌다. 스코틀랜드 도착 전후로 영화의 분위기가 갑자기 180도 바뀌어 버린 것이다.

 

  어떠한 종류의 작품이든 간에 작중의 흐름이라는게 있고 작중의 분위기라는게 있다. 이러한 흐름과 분위기는 내용에 따라 어느 정도 변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일관성은 유지해야한다. 물론 이러한 일관성을 유지하지 않고도 호평을 받는 작품들이 종종 있지만, 그런 작품은 상당히 드물다. 그리고 스카이폴은 분위기가 급격히 달라지는 지점에서 그런 소수의 작품에 들어갈 정도의 내용전개를 보여주지 못했다.

 

  물론 스카이폴에서 굳이 결전의 장소를 본드가 어린 시절 살던 집으로 선택한 건, 다분히 의도적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스카이폴에서는 과거의 007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요소들이 무척이나 많은데, 스카이폴이란 이름의 저택 역시 이러한 상징들의 연속선상에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러한 상징적인 저택의 등장을 개연성있게 풀어내지 못했다. 시리즈의 오랜 팬이라면, 다소 개연성이 떨어지더라도 이러한 상징 하나하나에 의미를 찾는 걸 즐거워할 지 모르지만, 007은 어디까지나 대중을 상대로 한 영화이며, 일반 대중은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야 이러한 상징들을 일일이 찾아가며 영화를 감상하지 않는다.  

 

  결국 느닷없이 등장한 본드의 가족사라는 소재가 작품의 분위기를 완전히 뒤바꿔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 상의 비중이 높지 않으니 관객의 입장에서는 ‘굳이 본드의 가족사를 넣어야만 했는가’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스카이폴은 과거 007 시리즈의 향수와 카지노 로얄 이후 유지해 온 하드보일드한 분위기를 잘 아우른 작품임에는 분명하다. 또한 작품 중반부까지 과거 007 시리즈에 대한 향수와 유사가족적 관계라는 두 가지 줄기를 잘 조화시켜 이야기를 전개해왔다. 그러나 본드와 M의 유사가족적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본드의 가족사를 집어넣는 무리수를 두었고, 그 결과 스카이폴의 후반부는 잘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했기에, 작품의 전후반부가 따로 노는 느낌을 주고 말았다.  

  • 00 2013.01.15 20:59 ADDR 수정/삭제 답글

    감상글 잘 읽었습니다. 하지만 저택의 뜬금성에 대해선 제 생각은 조금 달라요. 음. 실바라는 악당은 컴퓨터로 모든 것을 할 수있는 해커잖아요? 영화상에서도 본드걸의 입으로 나오죠. 컴퓨터 한 대로 가능했죠. 라고.. 그리고 본드 또한 우리들이 유리한 곳으로, 라는 말을 합니다.
    본드에게 유리한 곳은 잘 아는곳, 몸 대 몸으로 부딪히면 이길 수 있는곳, 전자장비, 최신식 무기가 전혀 없는 곳인 스카이폴 저택이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굳이 그 저택이여야만해? 라고 해도 역시 거긴 본드가 아는 곳이니까 라고 설명할수있을겁니다.
    물론 거기부터 서부극 느낌이나 좀 늘어지는 느낌은 저 또한 받았고 가족사는 어설프게 잠깐 드러내기만 해서 더 궁금증만 안은 기분이긴 하네요. ㅠㅠ 그래서 다음 007을 기다려보려고 합니다.

    • 성외래객 2013.01.19 15:23 신고 수정/삭제

      저 역시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공감하며,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택은 본드가 가장 잘 활약할 수 있는 장소이자, 실바와는 대립되는 곳이죠.

      다만 저택으로 향하는 과정이 다소 매끄럽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저택으로 가기 전부터 어느 정도 저택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면, 본드가 저택으로 간 게 좀 더 개연성 있게 그려질 수 있었을 테지만, 그 전까지 저택에 대해서는 영화 상에서 아무런 설명도 없었거든요;;

      스카이폴이 전반적으로 잘 만들어진 영화인지라, 이 부분이 매끄럽게 그려지지 못한 건 좀 아쉽네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