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링 조크(2010) - 영원히 마주할 수 없는 두 숙적의 이야기

  1980년대 당시 배트맨 시리즈는 침체기였다. DC코믹스에서 진지하게 배트맨의 은퇴를 고려했을 정도로 당시 시리즈의 사정은 좋지 못했는데, 이 당시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몇 개의 배트맨 만화가 등장하면서 이러한 흐름이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프랭크 밀러의 다크 나이트 리턴즈를 위시한 일련의 만화들은 다크 히어로로서의 배트맨을 부각시켰고, 이는 배트맨 시리즈를 넘어서 만화 자체에 대한 이미지를 바꿀 정도로 조명을 받았다.

 

  왓치맨, 브이 포 벤데타의 원작자이자 DC계열 히어로들의 이야기를 구성하는데 강한 영향을 끼친 앨런 무어는 이 시기에 브라이언 볼런드의 제안을 받고 조커의 원류를 찾는 이야기 킬링 조크의 시나리오를 구상했다. 그리고 이 47페이지 분량의 짧은 만화는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배트맨 코믹스의 4대 코믹스 중 하나로 인정받을 뿐만 아니라, 미국 코믹스의 큰 획을 그은 작품으로 회자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오랜 시간 이 작품을 비롯한 배트맨 코믹스가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었는데, 2008년 다크 나이트가 대히트하면서 세미콜론 출판사에서 배트맨 코믹스를 소개하기 시작했고, 킬링 조크는 그 이름값으로 인해 비교적 초창기에 정발되었다. 이 때 정발된 건 2008년 경 브라이언 볼런드가 채색을 다시 하고, 그의 단편 선량한 사람이 덧붙은 버전이다.

 

  이 만화에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두 개의 이야기가 동시에 진행된다. 하나는 아캄수용소에서 탈옥한 조커가 자신의 이론, 즉 평범한 사람이라도 한 번의 비극적인 사건을 겪으면 미쳐버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의 악행들 중에서도 가장 잔인하다고 여겨지는 범죄를 저지르는 이야기고 또 다른 하나는 조커 본인의 과거 이야기다. 사실 조커는 7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배트맨의 초창기에서부터 등장했을 정도로 역사가 오래된 악역이지만, 조커의 과거가 제대로 밝혀진 적은 없었다. 국내에는 팀 버튼의 1989년도작 ‘배트맨’ 영화의 영향으로 배트맨의 부모를 죽인게 조커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실제 원작에서 배트맨의 부모를 죽인 자와 조커는 별개의 인물이다.

 

  킬링 조크에서는 이렇듯 과거가 불분명한 조커의 과거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이 작품에서 조커는 본래 가난한 무명 코미디언이었던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자신이 말한대로 한 번의 비극적인 사건으로 인해 미쳐버리게 된다. 조커의 과거는 강렬한 그림체와 어울려 인상적으로 다가오는데, 정작 조커 자신은 기억이 뒤죽박죽이라 어떤 것이 자신의 과거인지 알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인다. 결국, 킬링 조크에서 나타난 조커의 과거 모습도 진짜인 지는 알 수 없는 것인데, 이는 혼돈 또는 순수한 악으로 상징되는 조커의 캐릭터와 잘 맞아떨어지는 부분이다. 이러한 설정은 후에 나온 영화 다크 나이트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다크 나이트에서도 조커는 자신의 과거라며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어떤 것이 진짜 과거인지는 마지막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어쨌든 이 작품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건, 조커가 어떠한 과거로 인해 미쳐버렸다는 게 아니다. 정말로 중요한 부분은 마지막 장면에 배트맨과 조커가 주고 받는 대화다. 배트맨은 자신의 오랜 숙적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민다. 그러나 조커는 킬링 조크, 죽이는 농담으로 배트맨의 제의를 받아친다. 그 농담에 두 숙적은 자신들이 영원한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그야말로 미친 듯이 웃는다. 조커의 과거가 어찌되었든, 두 인물은 영원히 마주할 수 없다. 조커는 계속해서 배트맨을 방해할 것이고, 배트맨은 그런 조커를 잡을 것이며, 종국에는 배트맨의 말대로 누군가 누구를 죽이는 파멸에 이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트맨이 조커의 농담을 알아듣고 실소하는 부분에서 적이면서도 강한 동질성을 갖는 둘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야말로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배트맨과 조커의 모습을 잘 드러낸 명장면이 아닐 수 없다.

 

p.s

  킬링 조크보다 짧은 분량의 단편 선량한 사람은 정말 짧긴 했지만, 그 안에 배트맨의 주요 악역들이 거진 등장했고, 무엇보다 선량한 사람의 섬뜩함을 잘 포착한 단편이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