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 흐름의원(2000) - 모든 장점을 묻어버린 극악한 게임성

  플러스-내 기억 속의 이름이라는 작품으로 한국 게임계에 데뷔한 아트림미디어는 비록 플러스가 수많은 버그와 낮은 게임성으로 강한 비판을 받긴 했지만 국내게임회사로는 드물게 미연시라는 장르에 도전했고, 나름대로 스토리나 일러스트는 준수했기에 유저들에게 자신들의 이름을 알리는데에는 성공했다.
 
  아트림미디어는 플러스 이후 바로 차기작 발매를 준비하는데, 이 때 이들은 당시로서는 드물었던 원 소스 멀티유즈 전략을 채택한다. 즉, 애초에 기획부터 하나의 이야기를 가지고 여러 가지 장르로 뻗어나갈 작정을 하고 게임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 기획의 이름은 이른바 '프로젝트 제로'였고, 아트림미디어는 이 프로젝트에 상당한 공을 기울인다. 이 프로젝트의 중심이 되는 제로-흐름의원 게임이 발매되기 전, 영챔프에 유명한 만화가 박성우와 협력해 제로-시작의관을 연재했고, 한권으로 구성된 홍보용 만화를 내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원작자 임달영이 한권으로 구성된 소설을 냈고, 게임관련 매체나 만화 관련 매체에 프로젝트를 홍보하는 광고도 여러차례 실었다. 그리고 게임을 발매할 때, 한정판에는 일러스트집과 OST앨범, 그리고 이전에 나왔던 만화책과 소설책을 동봉해 소장가치를 높이기도 했다. 

  또한, 아트림미디어 측에서는 이 프로젝트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면 다른 프로젝트로도 뻗어나갈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실제로 제로 퍼펙트 디멘션이 발매될 당시, 임달영 작가는 제로2에 대한 생각이 있었다고 밝혔고, 예전에 개인 홈페이지를 운영할 당시 다른 게임기로의 이식이나 애니메이션화에 대한 생각이 있었음을 넌지시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프로젝트 제로는 실패하고 말았다. 어디까지나 외전 정도로 시작하였던 제로-시작의관이 본작보다 흥행하면서 임달영이 스토리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히는데 도움을 주긴 했지만,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의 중심, 게임이 좋은 실적을 거두지 못했고, 이는 프로젝트 자체의 실패로 이어졌다.

  사실 제로 흐름의원의 스토리나 일러스트는 정말 괜찮은 편이다. 당시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이수현, 김광현 같은 원화가들은 현재 아트림미디어의 만화가로서 활동하고 있는데, 이들의 그림 자체가 지금도 호평을 받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일러스트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제로-흐름의원은 일러스트 부분으로 비판을 받은 적은 거의 없다.

  전작 플러스에서도 일러스트 쪽은 꽤나 호평을 받은 부분이었는데, 아트림미디어는 적어도 이 부분에서 전작의 장점을 계승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뭐, 임달영 작가가 예전에 개인 홈페이지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플러스 때보다 일러스트의 양이 많이 늘었다며 질 보다 양이었다라는 식의 개그글을 올린 적은 있지만;

  임달영 작가 최고의 역작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스토리는 괜찮은 편이었다. 물론 근친상간 등의 요소로 인해 스토리 자체에 대한 호불호는 많이 갈리는 편이지만 제로 흐름의원의 스토리는 대체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임달영 작가의 작품 중에서는 제로 흐름의원을 가장 좋아하는데 역시나 이유는 매력적인 스토리에 있다. 현재-과거-현재를 오가며 펼쳐지는 전생에 얽힌 스토리와 레기오스 때부터 이어져내려온 임달영 작가 고유의 설정, 그리고 다양한 개성을 지닌 캐릭터들은 가히 임달영 작가 최고의 역작이라 불릴만 하다.

  실제로도 임달영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대표작을 언급할 때 제로를 빼놓지 않는다. 비록 제로 퍼펙트 디멘션이 2000년대 후반에 나오기는 했지만 제로 시작의관이 완결된지도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그의 대표작이라 불리는 걸 보면 임달영의 작품들 중에서 이 작품이 어떠한 위치에 놓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부분이 임달영 작가가 사람의 가슴을 울리는 스토리를 써내는데 능숙하다는 점이다. 그가 쓴 단편을 토대로 만들어진 아마추어 게임이 스토리 면에서 크게 호평을 받은 적이 있고, 유령왕 1부 3권에서도 이런 부분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호평을 한 적이 있다.

  제로 흐름의원 역시 이런 임달영 작가의 강점이 스토리에서 잘 드러나고 있는데, 이야기 진행상 베드엔딩, 그러니까 흔히들 말하는 진엔딩 루트로 이야기를 진행할 시 펼쳐지는 이야기는 지금봐도 사뭇 감동적이다.

  앞서 언급했듯 이 게임은 상업적으로는 실패했지만 스토리 자체는 대체로 호평을 받았고, 이러한 부분은 후에 프로젝트 제로가 제로 퍼펙트 디멘션으로 부활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좋은 스토리와 좋은 일러스트에 걸맞게 이 게임은 연출력도 괜찮은 편이다. 임달영 작가는 유령왕에서도 일러스트를 이용해 이야기의 감동을 더해주는 연출을 선보인 적이 있는데 사실 이런 그의 연출력은 제로 흐름의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이야기가 긴박하게 전개되는 3장 해방의관에서의 연출력은 정말 빼어난 수준이다. 긴박한 음악과 교차하는 일러스트 등을 통한 연출은 확실히 게임의 몰입도를 높여준다.

  개인적으로는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이 게임의 독특한 설정과 세계관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임달영 작가는 레기오스 이후 비슷한 스토리와 설정 등으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 사람이 한 우물만 파다보면 어느 순간 정말 그럴 듯한 물건이 나올 때가 있다.

  제로 흐름의원 역시 그러한 경우로 전생과 오컬트라는 뻔한 소재에 임달영 작가 고유의 설정이 녹아들면서 꽤나 독특한 세계관이 완성되었다. 초능력을 이용한 전투 등은 임달영 작가의 작품에서는 흔하게 사용되는 소재이지만 이 부분이 전생과 오컬트, 그리고 로봇물 등의 설정과 어우러지면서 색다른 느낌을 자아낸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은 제로 시작의관에도 이어졌고 제로 시리즈는 임달영 작가의 작품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팬들 사이에서 설정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오고가는 편이다.  

  이렇듯 장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제로 흐름의원은 상업적으로 실패하고 지금까지도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일까?

  앞서 언급한 대로 제로 흐름의원은 스토리, 일러스트 등이 빼어난 수준이며 음악 역시 무척 괜찮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게임이다. 살짝 아마추어 느낌이 나는 보컬이 아쉽기는 하지만 이 게임의 음악은 지금 들어봐도 괜찮은 느낌을 주는 음악들이 많다.

  그러나 역시 게임이란 매체에서 가장 중요한 건 게임성이다. 아무리 스토리가 좋고, 일러스트가 좋고, 음악이 좋아도 게임성이 좋지 않다면 그 게임은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 그리고 제로는 이 점을 간과했기에 실패했다.

  일단 가벼운 부분부터 짚고 넘어가자면 위의 장면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게임 상의 스텟이다. 기본수치라는 면을 보면 여러가지 설정들이 등장하는데 저런 설정들이 게임에서 제대로 구현되었다면 모를까, 저런 부분들은 그야말로 설정에 그치고야 말았다. 차라리 보여주지 않았으면 모를까, 여러가지 설정들을 모두 공개해놓고 실제로 게임 상에서는 구현할 수 없으니 게이머의 입장에서는 다소 맥이 빠진다.  

  그러나 역시나 제로 흐름의원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전투다. 많은 이들이 제로 흐름의원의 전투에 강한 비판을 가했는데 이 부분은 정말 제로의 가장 큰 문제점이다.

  다른 게임들처럼 제로 흐름의원에도 여러가지 기술들이 있고 한 번에 3인까지 전투에 참가할 수 있기에 이 점을 이용한 체인기술 역시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부분들을 잘 살렸다면 충분히 전투를 재밌게 이끌어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제로 흐름의원의 전투는 그야말로 너무나도 재미가 없다. 정말 재미가 없어도 심하게 없다. 게임이 나온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전투씬 때문에 까이고 까이고 또 까이고 원자 단위로 까이고 있으니 말 다했다(...)

  그저 한 대씩 주고받을 뿐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전투, 8,90년대 게임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든 유치한 전투 이펙트와 손발이 오글거리는 성우들의 대사. 전투와 동시에 게임을 꺼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만드는 걸 보면 참 이 게임의 전투는 나름대로 대단한 건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이것 뿐만이 아니다. 이 게임은 어느 정도 이벤트가 진행되면 유기의 집에서 게이머가 원하는대로 행동을 취할 수 있게 된다. 집에서 나가면 유기의 동네가 나오면서 다른 곳으로 이동이 가능한데 문제는 어떠한 장소에 들어가도 적들과 전투가 벌어진다는 것이다(!!!)

  학교를 가도, 오락실을 가도, 슈퍼마켓을 가도, 심지어 같은 편인 하나의 집에 가도 오로지 전투 뿐이다(...)

  정말 갈 곳은 많은데 할 수 있는 건 오직 전투 뿐이다. 이럴 거면 뭐하러 월드맵을 만들어 놓은 건지 모르겠다.

  물론 스토리에 따라 몇몇 장소에서는 이야기가 진행되긴 하지만 그걸 위해서 이 정도 크기의 월드맵을 만든 건 그야말로 낭비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차라리 이런저런 서브스토리를 만들어서 넣든가, 아니면 미니게임이라도 좀 만들던가 하지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월드맵을 이따위로 만들어놓은 걸까;;

  매력적인 스토리와 일러스트, 수준급의 음악에도 불구하고 게임의 가장 기본적인 게임성 측면에서 문제가 많았기에 결국 이 게임을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게임의 가장 기초적인 부분을 간과했기에 프로젝트 제로는 들인 노력에 불구하면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로도 아트림미디어의 게임들은 게임의 가장 근본적인 게임성 측면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그 중의 정점은 역시나 제로 흐름의원이라고 할 만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어설프게 전투를 추가하기보다는 비쥬얼노블이나 미연시 쪽으로 게임방향을 잡았더라면 지금까지도 손꼽히는 한국 쿠소계의 대표적인 게임이 되지는 않았을 거다;;

  더군다나 이 게임은 제로 버그의원이라는 이명이 있을 정도로 버그가 심각한 편이다. xp의 경우 서비스팩2가 나온 이후로 이상하게 버그가 급감했지만 이전까지 이 게임을 하다보면 극악한 전투와 더불어 각종 버그들 때문에 게임을 하고 있다기보다는 인내심테스트를 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특히 스토리 상 전투가 연속으로 이어지는데 거기서 팅겨버리면 그냥 접어버릴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플러스 때도 버그로 욕을 먹긴 했지만 그래도 플러스는 게임 발매 직전에 메인 프로그래머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숨을 거두었기에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한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제로 흐름의원은 그런 것도 없고, 전작에서 버그로 그렇게 욕을 먹었음에도 후속작이 이 정도의 버그를 보여주었다는 건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는 부분이다.

  결국 이 게임의 실패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어떤 장르든 간에 기본에 충실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거다.

앞서 언급했듯 개인적으로는 이 게임의 스토리나 설정 등을 무척이나 좋아하며 이 게임을 통해 임달영 작가의 팬이 되었지만 게임성에서만큼은 도저히 좋은 평을 해줄 수가 없다.

  • 고담종자 2012.03.23 22:09 ADDR 수정/삭제 답글

    솔직히 정품 CD를 갖고 있는 입장으로 말하자면 게임은 정말 버리고 싶습니다. 스토리때문에 XP에서 계속 튕기면서도 클리어 했지만(2장이 정말 지옥이었습니다.) 결국 깨고 난 후에는 봉인...

    • 성외래객 2012.03.24 16:57 신고 수정/삭제

      솔직히 제로 시리즈 참 좋아라합니다. 매력적인 캐릭터들도 좋고 임달영의 모든것이 집대성된 것 같은 세계관도 좋습니다. 스토리는 두 말할 것도 없고요.

      그러나 도저히 2회차 플레이는 못하겠더군요;; 다시 해볼까 싶다가도 그 전투씬과 지루한 플레이를 생각하면(...)

  • ㅋㅋㅋ 2012.10.12 04:15 ADDR 수정/삭제 답글

    근데 제로 흐름의원 책을 읽으니 뒷 내용이 너무 궁금하네요 좀 알려주실수 없나요...?? 시작의 관 이랑의 관계도요

    • 성외래객 2012.10.14 22:58 신고 수정/삭제

      덧글로 설명하기에는 해방의관 스토리가 긴 편인지라, 조금 어려울 듯 합니다; 책으로 나오면 이것도 최소 3권 분량인지라;

      시작의관은 제로 흐름의원으로부터 16년 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작품입니다. 작중의 주인공 아사카와 슈우이치는 흐름의원의 안티히어로 격연의 아버지죠. 그리고 유신은 흐름의원의 주인공 유기의 아버지입니다.

      즉, 시작의관은 흐름의원 주인공들의 아버지세대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흐름의원에서는 속박의관이라는 과거편이 존재하지만, 시작의관 인물들 중 속박의관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인물은 없어보입니다.

  • 새누 2013.03.04 07:48 ADDR 수정/삭제 답글

    다만 엔딩 자체도 그렇고 솔직히 영 그랬습니다. 기본적으로 해피한걸 선호하기도 하고...

    • 성외래객 2013.03.04 16:53 신고 수정/삭제

      흐름의원의 시나리오야 소재가 소재이니만큼 호불호가 갈리는 작품이긴 하죠. 개인적으로는 소재를 가리는 편이 아니어서 제로 흐름의원 역시 스토리만 놓고본다면 좋아라하는 편입니다. 어디까지나 스토리만(...)

      진엔딩의 경우 너무 비극으로 흐른 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전반적인 분위기를 고려한 나름대로 괜찮은 엔딩이었던 것 같습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