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십자가(2008) - 기괴함에 묻혀버린 스토리

  악마의 십자가는 배트맨 그래픽노블 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색채를 지닌 작품이다. 표지에서도 나타나있듯이 기존 배트맨과는 작풍에서부터 큰 차이를 보이는데,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이 작품의 분위기는 기괴하다.

 

  다루고 있는 소재부터가 부두교라는 기존의 배트맨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오컬트적인 소재이며, 작품 내의 주적은 다름아닌 초현실적 존재인 악마다. 앞서 언급한대로 작풍도 굉장히 독특한데, 개인적으로는 그로테스크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덕분에 작중의 분위기도 액션이나 스릴러 혹은 캐릭터극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호러물에 가깝다는 느낌이 든다.

 

  덕분에 이 작품은 작중 배트맨의 심리묘사에는 탁월한 면모를 보여준다. 짦은 만화이지만 중간중간 브루스 웨인의 꿈 등을 통해 배트맨의 심리묘사가 등장하는데, 워낙에 그림체 자체가 독특한 지라 한 장면, 한 장면이 강렬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악마의 십자가의 장점은 딱 거기까지다. 추상적이고 기괴한 그림체로 독특한 느낌의 작품을 만들어내었지만, 안타깝게도 스토리가 그림체를 따라가지 못했다. 고담에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배트맨이 이 사건이 악마의 십자가와 관련이 있다는 걸 알아내는 부분까지의 스토리는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이 기괴한 사건을 통해 심리적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인물들의 묘사까지도 괜찮았다. 문제는 마무리였다.

 

  사실 작품 자체의 분량이 짧았고, 그로 인해 등장인물 또한 적은 편이었던 지라, 용의자 자체가 많지 않았다. 무엇보다 범인을 추리할 단서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 작품에서 범인의 정체는 그렇게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빈약한 범인의 범죄동기는 이 작품 내내 유지되었던 긴장감을 완전히 허물어버린다.

 

  악마의 십자가에서 펼쳐지는 사건은 결코 스케일이 작은 사건이 아니다. 실제로 범인이 자신의 계획을 성사시켰을 경우, 더욱 큰 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엄청난 범죄를 기획한 범인의 범죄동기가 독자입장에서는 코웃음을 칠 정도로 빈약하다보니 작품 자체의 긴장감이 망가져버린 것이다. 더군다나 독자가 너무나 빈약한 범죄동기에 당황하는 사이, 범인은 너무나 전형적인 최후를 맞이하고 이야기는 급하게 마무리되어버렸다. 이러다보니 작품 전체에 흐르던 기괴함마저 결말에 이르러서는 웃기는 게 되어버렸다.

 

  자신 만의 독특한 화풍으로 이미 확립된 배트맨의 세계관에 기괴함을 덧씌운건 분명 참신한 시도였다. 그러나 분위기 자체에 너무나도 많은 힘을 쏟은 까닭인지, 후반부 스토리가 너무나 형편없었다. 악마의 십자가는 분명 참신하고 나름대로의 매력을 가진 작품이었지만, 너무 참신함에만 힘을 쏟은 까닭인지, 정작 중요한 스토리에서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