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선혈

                     
                      모래선혈
                      8점

2008년에 얼음나무숲이라는 작품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하지은 작가는 그로부터 1년 후, 모래선혈이라는 작품을 출간한다. 

얼음나무숲에서 한국 장르문학 계에서는 좀처럼 다루지 않았던 음악이라는 소재를 다뤄 호평을 받은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는 작가와 글이라는 소재를 차용한다. 다만, 전작과는 다른 점이 있다면 얼음나무숲에서의 음악은 그야말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중심소재였지만 모래선혈에서의 작가와 글은 상대적으로 부차적인 소재라는 점이다.

모래선혈의 중심 뼈대는 어린 시절부터 색을 보지 못하고 모종의 사건으로 감정을 잃게 된 레아킨이 어떠한 글을 계기로 잃었던 것들을 되찾아가는 내용이다.

따라서 처음으로 책을 읽고 감동이란 걸 받아보고 그 작가를 직접 만나보려는 초반부에는 작가와 글은 매우 중요한 소재이지만, 이후 레아킨이 작가 비오티를 사랑하게 되고, 나라를 되찾으려는 라노프인들의 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지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래선혈에서 작가와 글이라는 소재는 꽤나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작가가 말하는 소설, 그리고 잡담 형식으로 스쳐가는 작가들의 고뇌, 때로는 코믹하게 묘사되는 작가와 마감의 관계 등등을 작가 특유의 시각으로 잘 풀어놓고 있다.

이 외에도 문화통치를 당하고 있는 라노프의 현황, 초반부터 진득하게 깔아놓은 온갖 복선과 암시 등은 글을 읽는 즐거움을 더해준다. 물론 얼음나무숲에서 그러했듯이 모래선혈의 캐릭터들 역시나 생동감이 넘쳐흐르고. 그리고 여기에 섬세하고 미려한 묘사가 더해주니 보는내내 역시 하지은 작가다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러나 모래선혈을 본 대다수의 평은 얼음나무숲보다는 상대적으로 떨어진다였고, 나 역시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 확실히 얼음나무숲보다는 조금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앞서 언급한 요소들에 400페이지가 넘는 이야기를 단숨에 읽어나갔으니 그 필력 역시 여전함에도 모래선혈이 얼음나무숲보다는 상대적으로 못하게 느껴지는 원인은 아무래도 작품 후반부에 있는 것 같다.

작품 중반부에 라흐가 잡히고 혁명의 조짐이 보이면서 이야기는 긴박하게 전개된다. 그리고 그 쯤해서 초반부에 깔아두었던 복선이나 암시들의 의미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기에 재미는 배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재미는 타락이 등장할 때 그야말로 극에 달한다.

문제는 그 다음 장에서 레아킨과 비오티가 제국의 수도로 여정을 떠나면서 갑자기 맥이 풀리는 느낌을 받게 된다는 거다. 독자는 이제 이야기가 클라이막스로 치달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예상 외로 이야기 전개가 다시 느슨해져버린 것이다. 그런 데다가 그 때 남은 책의 분량은 120페이지 정도인데 그 안에 제국으로의 여정, 과거의 진실, 그리고 황제와의 만남을 모두 엮으려니 아무래도 초반부에 비하면 이야기 구조가 상대적으로 빈약한 느낌이 드는 건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전개가 되다보니 당연히 엔딩 부분이 상대적으로 허술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물론, 엔딩 장면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얼음나무숲 때처럼 가슴이 먹먹함을 느낄 수 있었고 이어진 에필로그는 긴 여운을 남겨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낌 상, 2부가 되어버린 후반부가 120페이지에 불과했기에 독자로서는 상대적으로 후반부가 부실하다는 느낌이 들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엔딩이 심하다 싶을 정도로 부실한 건 아니고, 후반부에 페이지를 늘리고 좀 더 짜임새 있는 전개를 보여줬다면 더 좋은 작품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아쉬움이 남아서 하는 소리다.

얼음나무숲처럼 하지은 작가의 글은 여전히 신선했고 섬세한 문장력도 여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역시나 재미가 있었다. 그런데다가 개인적인 취향과 거의 일치하는 글이라 더욱 빠져들어서 봤던 것 같다. 그러나 확실히 후반부에서의 전개는 조금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