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드래곤 라자 1 (10주년 기념 양장)
              10점
 

98년 민음사의 자회사인 황금가지에서 드래곤 라자라는, 당시로서는 생소한 이름의 책이 출간된다. 그리고 그 책은 이후 한국 장르문학계의 전설이 되었다.

PC통신 하이텔에 연재될 때부터 수많은 사람들의 밤잠을 앗아간 이 작품은 책으로 출간된 후 100만부가 넘는 판매고를 올리며 그 해의 베스트셀러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이는 장르문학의 불모지나 다를 바 없었던 한국 장르문학계에 커다란 사건이었다.

이후, 자음과모음을 필두로 한 여러 출판사에서 통신에서 연재되던 장르문학들이 책으려 나오기 시작하면서 한국 장르문학계는 그야말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른바 1세대 판타지 작가들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드래곤 라자의 성공은 한국 장르문학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셈이었다. 물론 그 전에도 레기오스나 바람의 마도사와 같은 작품들이 출간되었고 바람의 마도사의 경우 상업적으로 성공하기까지 했지만 드래곤 라자처럼 장르문학의 붐을 가져오지는 못했었다.

개인적으로 드래곤 라자를 처음 접한 건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학교에 반친구가 책을 하나 들고 왔는데 책의 제목이 상당히 낯설었다. 그래도 뭔가 흥미로워보여 친구에게 빌려서 50페이지 가량을 읽을 수 있었는데 그 책이 바로 드래곤 라자였다.

당시에 나는 여러 RPG 게임들을 접해보기는 했지만 판타지 소설은 처음 접해보는 지라 꽤나 생소했다. 그래서 재미있다고는 느꼈지만 이내 그 책을 잊어버렸다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난생 청음 영풍문고에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드래곤 라자를 만날 수 있었다.

고작 50페이지 읽었을 뿐이지만 드래곤 라자에 꽤나 반했던 나는 그 때부터 당시의 용돈을 쪼개가며 한달에 한 두권씩 드래곤 라자를 사서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내 생에 최고의 책을 접할 수 있었다.

당시에 나는 또래아이들에 비해서 책을 많이 읽는 편이긴 했지만 그 수준이라야 아동용 세계문학정도였다. 그러던 내가 이렇게 방대한 이야기 구조와 깊은 주제를 가진 책을 처음으로, 그것도 너무나도 재밌게 읽었으니 그 충격이야 오죽했겠는가.

일단 드래곤 라자의 캐릭터들은 그야말로 생동감이 넘친다.

특히 이번에 다시 읽었을 때는 드래곤 라자 이후의 이영도 작품들을 모두 접해보고 다시 읽었던 지라 그 느낌이 더했던 것 같다.

드래곤 라자 이후에 나온 작품들에서도 이영도 작가의 캐릭터들은 개성이 넘친다. 그렇지만 생동감만큼은 드래곤 라자가 최고가 아닌가 싶다.

굳이 이영도 작가의 작품 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내가 접해 본 모든 작품들을 통틀어서도 가장 생동감 있는 캐릭터들이 있는 작품은 드래곤 라자인 것 같다.

헬턴트 영지의 초장이 후보 후치 네드발, 헬턴트의 경비대장이자 물레방앗간 처녀의 그분 샌슨 퍼시발, 영주 대리인 칼 헬턴트, 마법검을 들고 황소를 타고 다니는 폐태자 길시언 바이서스, 아름다운 밤의 나이트호크 네리아, 톱메이지 아프나이델, 가장 존귀한 드워프 엑셀핸드 아인델프, 갈림길의 테페리의 성직자 제레인트 침버, 엘프 이루릴 세레니얼, 전향한 간첩 운차이 발탄, 항구의 소녀 레니...

정말 이렇게 단순히 이름만 언급하기에는 너무나도 아쉬울 정도로 매력 넘치는 캐릭터들의 넘쳐난다.

특히 드래곤 라자는 후치를 주인공으로 한 1인칭 시점을 사용하는데 이 녀석이 워낙에 조숙하면서도 유쾌한 녀석인지라 그러한 생동감은 배가 되었던 것 같다.

또 세계관은 얼마나 멋진가.

비록 D&D룰을 사용하긴 했지만 이영도 작가가 창조한 드래곤 라자의 세계관은 너무나도 매력적이다.

수많은 장르문학들을 봐왔지만 이렇게까지 여러 종족의 특성을 잘 그려낸 작품을 난 보지 못했다. 그리고 프리스트들마다 다른 인사말과 고유능력들, 루트에리노와 핸드레이크, 무지개의 솔로처와 100명의 데스나이트, 그덴 산의 거인, 영광의 7주 전쟁과 같은 가슴 떨리는 전설들.

드래곤 라자는 후치라는 유쾌한 녀석을 내세운 1인칭 주인공 시점과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로 인해 진지한 가운데서도 유머러스하지만 그만큼이나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작품이기도 하다.

후치라는 녀석 옆에서 같이 모함을 하는 기분도 들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도 멋진 옛이야기를 듣는 기분도 든달까.

또, 그에 걸맞는 명대사들도 수두룩하다. 아마 장르문학 단일 작품으로 이렇게 많은 명대사를 보유한 책도 드물 거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드래곤 라자는 이영도 작가 특유의 주제의식이 물씬 묻어나는 작품이기도 하다.

내가 이영도 작가를 정말 타고난 이야기꾼이라 생각하는게 바로 이 부분 때문이다.

꽤나 묵직한 주제이기에 다소 책이 어려워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영도 작가는 이야기와 설정 속에 무거운 주제가 튀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녹여내었다.

정말 보는 내내 도대체 어느 정도 급이길래 이렇게까지 기가 막힐 정도로 멋진 이야기를 쓸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으니까.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12권에 수록된 송경아 씨의 글에서도 언급한 영원의 숲이라는 설정이다. 영원의 숲이란 들어간 사람이 자기 자신을 의심하는 순간 자기 자신이 분열되어버리는 곳인데 이영도 작가는 '자기분열'이라는 걸 판타지적인 설정에 기가 막히도록 잘 녹여내었다.

그리고 처음 봤을 때는 독특한 설정 정도로 보였던 드래곤 라자가 이야기 후반부에 자신의 실패를 깨달은 핸드레이크의 작품이라는 부분도 인상 깊었다.

사실 어릴 때 봤을 때는 핸드레이크라는 인물은 그저 전설적인 인물 정도로 다가왔지만 10년이 지나고 다시 본 드래곤 라자의 핸드레이크는 참 보는 사람 가슴을 아프게 하더라.

300년간 핸드레이크는 어찌되었던 모든 종족읜 보다 나은 완전성을 위해 노력해왔다. 그리고 300년 전에도 좌절을 맛보았고 300년 후에도 좌절을 맛보았다. 그렇게 그는 300년간의 실패를 짊어지고 절규했다.

이야기 속의 후치는 핸드레이크의 실패를 지적하며 계속해서 동정심은 들지 않았다고 하지만 나는 그런 핸드레이크의 모습이 너무나도 가슴 아팠다.

그리고 대마법사 핸드레이크를 실패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던 각 종족의 불완전성과 선과 악의 균형자, 크라드메서마저도 변화시켜버린 인간이란 종족인 참 묵직하게 다가왔다.

어릴 때 읽었던 드래곤 라자는 크라드메서의 폭주도 막고 아무르타트에게 잡혀간 후치의 아버지도 구한 말그대로 해피엔딩이었지만 그 후로 읽은 드래곤 라자는 매번 읽을 때마다 감동과 함께 씁쓸한 여운을 남기는 것 같다.

드래곤 라자를 처음 접한 지 벌써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아직까지도 나는 내 생에 최고의 책은 드래곤 라자라도 단언할 수 있다.

아직도 드래곤 라자라는 작품을 생각하면 마음이 설레고 드래곤 라자의 첫장을 읽기 시작하면 나 또한 마법의 가을에 들어선 것처럼 흥분되는 마음을 감출 길이 없다.

이영도 작가님,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이런 괴물같은 작품을 쓴 겁니까ㅠ.ㅠ

이래서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니까.


p.s 드래곤 라자는 내가 읽은 최초의 장르문학이었다. 곧 이 책이 내가 이쪽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입문서라는 소리다. 지금의 내 취미생활을 형성하는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게 바로
      드래곤 라자라는 소리(...)

p.s2 08년에 나온 드래곤 라자 10주년 기념 양장본의 경우 내용상의 변화는 없다고 한다.
      오타 좀 수정하고 D&D표절논란으로 인한 몇몇 단어의 수정 정도.
  • ㅎㅎㅎ 2011.11.27 14:34 ADDR 수정/삭제 답글

    저는 판타지에 입문한 계기가 초등학생때 접한 퇴마록이었습니다. 그래서 전 항상 최고의 작품을 꼽을땐 퇴마록을 꼽게 됩니다.ㅋ

    드래곤 라자같은 경우엔 상당히 최근에(군대) 읽은 작품인데요. 굉장히 옛날작품인데도 참 이야기가 매끄러워서 술술 읽히던 기억이 납니다.

    • 성외래객 2011.11.27 19:49 신고 수정/삭제

      일단 제가 드래곤 라자를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이유는 물론 작품의 퀄리티도 무척이나 뛰어나지만 가장 처음 본 장르문학이라는 점도 어느 정도 반영된 것 같습니다ㅎㅎ

      지금까지 한 다섯번 정도 본 것 같은데 볼 때마다 항상 설레고 재밌더군요^^

  • 우연히 지나가다 2012.09.13 15:36 ADDR 수정/삭제 답글

    저도 우연히 동사무소에 딸린 도서관에서 라자를 접하며 처음으로 장르문학을 접했어요!ㅎㅎ
    그 매력이란! 아.. 하지만 저는 끝내 퓨처워커는 포기해야만 했답니다 ㅠㅠ

    • 성외래객 2012.09.15 16:27 신고 수정/삭제

      드래곤 라자는 정말 좋아하고 사랑하는 소설입니다ㅎㅎ 퓨처워커는 사실 드래곤 라자 같은 스타일을 생각하고 봤다면 적응하기 어렵죠; 이영도 작품 중에서 아무래도 가장 인기가 떨어지는 작품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제 취향에 100% 직격한지라 퓨처워커도 재밌게 봤던 것 같습니다ㅎ

  • 새누 2013.03.04 05:46 ADDR 수정/삭제 답글

    그런데 이영도작가님은 후치를 어둠의 자식 취급한다는 애기가... 그래서 후속권에는 언급도 없죠 ㅎ

    • 성외래객 2013.03.04 15:38 신고 수정/삭제

      아무래도 작가의 입장에서는 말빨 세고 캐릭터성 강한 후치를 제어하는게 어려운 일이었겠죠; 이해가 가는 부분이긴 하지만, 그래도 팬의 입장에서는 좀 아쉬운 부분이긴 합니다ㅎ 피마새에 잠시나마 이름이 언급되긴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