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 왕이 된 남자(2012) - 백성은 스스로가 돕길 바라는 지도자를 원한다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사실 그렇게까지 높은 기대를 받은 작품은 아니었다. 이병헌의 복귀작, 그리고 이병헌의 사극 도전이라는 점 때문에 어느 정도 주목을 받긴 했지만, 한국형 오션스 일레븐을 표방하며 화려한 배우진을 내세운 도둑들과 비교하면 광해에 대한 기대는 그리 크다고 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광해는 개봉과 동시에 무서운 속도로 흥행몰이를 하더니, 결국 도둑들에 이어 2012년에 두번째로 천만관객을 돌파하는데 성공했다.

 

  사실 광해가 천만 관객을 돌파한 건, 확실히 운이 좋은 측면도 있었다. 광해는 개봉 이후 테이큰2, 회사원 등의 쟁쟁한 경쟁작들과 맞부딪혀야했는데, 예상 외로 경쟁작들은 혹평을 받으며 흥행몰이에 실패했다. 같은 시기에 개봉한 작품들 중 유일하게 광해만 호평을 받고 있으니, 아무래도 관객들의 시선이 광해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광해가 개봉한 시기는 18대 대선이 100일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런 데다가 광해가 개봉한 이후 안철수 후보가 출마 선언을 하면서 마침내 3자 대립 구도가 확립되면서 대선 레이스가 본격화되었다. 대중의 정치적 관심이 극대화된 이 시기, 이상적인 지도자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광해는 아무래도 주목받을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최근에 문제가 된 것처럼, 광해는 상영관 독점의 혜택을 톡톡히 보았다. 상영관 독점은 한국 영화계의 분명한 병폐이며, 이러한 밀어주기가 아니었다면 광해가 천만관객을 동원하는 건 꽤나 어려운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둑들이나 광해가 단순히 상영관 독점으로 천만관객을 돌파했다고 비하하는 건, 문제가 있다. 아무리 영화사에서 특정 영화를 밀어준다고 해도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나 7광구가 천만 영화가 되지는 않은다. 단순히 상영관을 독점했기 때문에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고 말하는 건, 한국 관객들의 수준을 너무나 무시하는 처사다. 운이 좋은 측면도 있었고, 과도한 밀어주기를 한 점도 있지만, 결국 광해가 천만 관객을 동원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영화 자체가 괜찮았기 때문이다.

 

  사실 광해의 주 소재, 그러니까 왕 혹은 지도자의 대역을 다룬 이야기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카케무샤 이후 많은 영화에서 사용된 소재다. 소재 자체가 이미 진부한 설정이 되어버린 것인데, 광해는 이러한 소재를 실제 한국의 역사와 접목시키면서 흥미로운 가상 역사물로 가공해내는데 성공했다.

 

  광해가 다루고 있는 시기는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듯이 조선 제15대 임금 광해군의 시대다. 광해군은 비록 연산군과 함께 시호를 받지 못한 조선시대 두명의 왕 중 하나이지만, 그가 표방한 중립외교정책으로 인해 현재 대부분의 대중에게 개혁군주로 인식되고 있다. 개혁군주는 2000년대 들어 사극에서 가장 각광받은 소재 중 하나다. 이미 공민왕, 정조, 소현세자 등 한국의 개혁군주들을 다룬 드라마나 영화가 수차례 제작되어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2000년대 들어 SBS 드라마 '왕의 여자'를 제외하면 광해군을 다룬 작품은 거의 없었지만, 개혁군주 광해군을 소재로 한 가상 역사물이라는 소재는 대중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야호 

  그리고 이병헌은 이 흥미로운 소재를 가진 작품 속에서 자신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이병헌의 연기력은 대다수가 인정하고 있지만, 오랜 시간 동안 대체로 폼나는 역할만을 맡아왔던지라, 특정 이미지 속에 갇혀버렸다는 느낌도 안겨주는 배우였다. 그러나 광해에서 이병헌은 코믹함과 진중함을 오가며 자신이 틀 안에만 갇혀 있는 배우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냈다. 사실 술과 여자를 좋아하고, 돈과 권력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평범한 평민에 불과한 하선이 단 15일 만에 이상적인 지도자로 성장한다는 건 어찌보면 다소 무리한 설정이었다. 평생을 신분제도라는 틀 안에서 살아온 인물이 고작 15일이라는 시간 동안 변화한다는 건 좀처럼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병헌은 이러한 무리한 설정을 자신의 연기로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물론 아무리 이병헌의 연기가 좋았더라도 짜임새 있는 전개가 뒷받침되지 않았더라면, 관객을 납득시키기 힘들었을 것이다. 광해는 중전과 도부장, 사월이, 그리고 허균과의 에피소드를 통해 하선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고, 이들과의 관계를 통해 이상적인 지도자로 성장해가는 하선의 모습을 그럴 듯하게 묘사한다.

 

    그러나 하선의 성장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유기적이다.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통해 하선도 성장했지만, 하선과 함께한 이들 역시 한 단계 성장한 모습을 보여준다. 중전은 하선과 함께 하며 잃어버렸던 웃음을 되찾았고, 고지식한 도부장은 하선의 정체를 알게 된 후에도 그를 자신의 왕으로 모신다. 처음에는 그저 음식을 많이 남겨주어 하선을 좋아하던 사월이는 진심으로 그를 믿고 따르게 되며, 허균은 마침내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그를 왕으로서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성장한 이들은 하선이 위기에 처하게 되었을 때,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하선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그렇게 모두는 진정성 있는 지도자와 함께 변화해간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하선이 자신들의 왕이 되어주길 바라지만, 역설적이게도 다른 이들에게 가장 많은 도움을 받은 인물은 다름 아닌 하선이다. 이들은 스스로가 원해서 하선에게 목숨을 걸고 도움을 주었다. 지도자가 진심으로 백성을 대할 때,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지도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었다. 비상한 정치적 감각이나, 강렬한 카리스마는 없을 지라도, 백성 스스로가 돕길 바라는 지도자. 이것이 광해가 보여준 이상적인 지도자의 모습이자 지도자와 백성의 이상적인 관계다.

 

  앞서 언급한대로 광해의 천만 관객 돌파는 도둑들과 마찬가지로 상영관 독점 아래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비판받고 있다. 또한, 최근에 광해가 대종상에서 15개의 상을 독식하면서 이러한 비판은 가중되었다. 하지만, 광해는 상영관 독점으로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고 단순히 비판하기에는 상당히 괜찮은 모습을 보여준 영화다. 이병헌을 비롯한 배우진의 탄탄한 연기력과 다소 무난한 스토리 라인을 보완해준 짜임새 있는 전개, 그리고 그 안에 진정성 있게 담아낸 이상적인 지도자에 대한 갈망은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