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의 열제

                                
                                  강철의 열제 1
                                 8점



국내 판타지 소설의 대세를 이루고 있는 장르는 어떤 걸까?

물론 지금도 몇몇 작가들은 독창적인 세계관과 참신한 스토리를 가진 책을 발표하고 있지만 2세대 판타지에 접어들면서 지금까지도 한국 판타지의 대세를 이루고 있는 건 차원이동물이다.

차원이동물이란 말 그대로 주인공이 어떠한 사건을 통해 이계로 넘어가서 겪는 일을 그리는 장르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등을 떠올려본다면 그 유래가 무척이나 오래된 분야다. 그러나 국내의 경우, 장르문학 작가의 진입장벽이 낮고, 초창기 이쪽에서 성공한 사이케델리아나 묵향의 성공 공식을 너도나도 따라하다보니 이쪽의 팬덤에게는 이계깽판물이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인식이 좋지 않은 장르다.

하지만 무려 10년이란 세월 동안 한쪽 장르를 파고 내려가다보니 적어도 재미라는 면에서만큼은 주목받은 작품들이 어느 정도 존재한다.

그 중 하나가 가우리의 처녀작, 강철의 열제다.

강철의 열제는 2004년 첫 출간되었는데 2010년 완결되기 전까지 대체로 호평을 받은 차원이동물 중의 하나다.

워낙에 국내에 차원이동물이 많다보니 강철의 열제는 나름대로 다른 작품들과의 차별화를 꾀하는데, 강철의 열제가 택한 방법은 바로 판타지에 역사를 결합한 것이었다.

작가의 필명과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작가는 한국의 고대국가 중 하나인 고구려에서 소재를 가져와, 당에게 멸망 직전, 고구려를 탈출한 묵갑귀마대를 포함한 고구려 유민들이 큰 해일을 만나 차원이동을 하게 되고, 그곳에서 고구려를 재건국한다는 내용을 그려내고 있다.

사실 수많은 작가들이 똑같은 장르를 그려내고 있다는 건, 그 장르가 독자들에게 강하게 어필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더군다나 고구려는 한국 사람들에게는 한반도 역사상 군사력만큼은 최고였다고 알려진 국가가 아닌가?

적어도 작품을 이끌어가는 소재만 본다면 강철의 열제는 충분히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강철의 열제에 그다지 손이 가지 않았던 건 사실이다. 표지 뒤에 그려진 대강의 스토리를 보자마자 대충 어떤 식의 이야기라는 게 짐작이 갔고, 고구려를 가져왔다는 부분에서 어설픈 민족주의가 아닐까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고구려를 가우리라 호칭하는 부분에서는 조금이지만 환단고기의 느낌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던 중 충동적으로 1,2권을 읽게 되었는데 초반부 내용이 다소 평이하긴 했어도 재미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았고, 민족주의 적인 측면이나, 환단고기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있긴 했지만 생각보다는 심하지 않았기에 생각보다 읽을 만하다는 인상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초반부에는 아직은 조금 미숙한 문체나 어색한 코믹씬,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캐릭터들이 조금은 거슬렸기에 좋은 인상을 받은 정도는 아니었다. 말그대로 그냥 생각보다는 읽을만 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내 생각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한 건, 4권에 등장한 비하넨 요새 공방전이었다. 비하넨 요새 공방전은 전쟁 묘사의 대가들보다는 다소 떨어지는 부분이 있긴 했지만 적어도 이 작가가 그저 그런 양판소 작가와는 다르다는 인상을 심어주기에는 충분했다.

그런데다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점차 자리를 잡아가는 캐릭터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극초반부만 하더라도 캐릭터들이 자연스럽게 개성을 발휘하기보다는 억지로 작가가 설정한 개성에 맞춰가는 느낌이 들었다면 4~5권쯤 왔을 때에는 그런 부분들이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때부터 서서히 캐릭터들에게 정이 가기 시작했다.

또한, 책을 쓰면서 작가 자신의 필력이 많이 상승한 것인지, 북로셀린군의 팀입을 물리치고 남로셀린을 재건하는 과정에 들어가서는 나름대로 능수능란한 전쟁씬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서서히 몰입도를 높여가는 스토리와 글솜씨, 캐릭터의 3박자는 개문산성 공반전에서 극에 달하게 된다.


그러나 개문산성 공방전에서 너무 많은 힘을 쏟은 탓일까? 이후로 강철의 열제는 다소 아쉬운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재미라는 측면에서는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개문산성 공방전이 너무 강렬했던 탓인지, 이후의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강렬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특히 18~19권 쯤에 그려진 제국연합과 신성제국의 전쟁은 다소 실망스러웠다. 이야기의 흐름상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긴 했지만 결과가 뻔히 예상되는 전투를 이렇게 길게 그려낼 필요가 있었나 싶다.

하지만 이보다 큰 문제는 진천을 너무 강력하게 그려냈다는 것이다. 강철의 열제에서 진천의 라이벌이라고 할만한 인물은 신성제국의 밀리오르 황제다. 그러나 밀리오르 황제는 지략적인 부분에서는 뛰어날 지 몰라도 무력적인 부분에서는 일반인 정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적어도 진천과 자웅을 겨룰 만한 인물이 있어야 했는데 이 부분에서 진천이 신성제국의 마스터 3명을 가지고 놀아버렸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너무나도 강력하게 묘사된 진천의 무위는 강철의 열제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할 신성제국과의 전쟁에 대한 기대감을 낮춰버렸다. 가장 강력한 신성제국의 마스터 3명이 합공을 했는데도 진천이 가지고 놀아버렸다는 건, 앞으로 있을 전쟁에서도 진천을 무력으로 누를 수 있는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작가도 이 부분을 의식해서인지 마지막 결전에서 제국의 마스터들을 가우리의 다른 장수들과 맞붙게 했지만, 이 책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진천이다.

전장을 돌아다니며 큰 활약을 펼치기는 했지만 남들은 모두 강력한 무력을 지닌 인물들과 격전을 벌였는데 진천이 한 일이라고는 전장을 휘저으며 일반 병사들과 부딪히다가 마지막에 닥치고 돌격한 것 뿐이다. 솔직히 마지막 전투에서 가우리군 중 비중이 제일 떨어진 인물은 진천이었다.

또한, 실질적으로 클라이막스를 장식한 건 루키아와 대결을 벌인 을지우루인데 이 역시 을지우루의 무력이 워낙 강하게 묘사되다보니 긴장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마지막의 전투씬이 재미가 없던 건 아니었다. 나름대로 재미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을지우루의 전투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마지막 전투에서 처음으로 만난 인물들끼리 부딪힌 전투였다. 이야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전투였다는 걸 감안하면 아무래도 아쉽다는 소리가 나올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 모든 걸 관통하는 가장 큰 문제는 개문산성 공방전 이후 신성제국이 너무 속절없이 밀려버렸다는 데에 있다.

적어도 개문산성 공방전까지는 신성제국이 가우리에 다소 밀리는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제국다운 면모를 보이며 가우리에게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개문산성 공방전 이후 전쟁은 가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만 흘러가게 된다.

신성제국의 인물들은 마지막에 가서야 그걸 눈치채고 놀라긴 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전쟁의 양상이 한쪽으로만 흘러가니 상대적으로 긴장감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결국 강철의 열제 후반부의 가장 큰 패인은 밸런스 조절에 실패한 거라고 볼 수 있다. 각 국가의 전쟁에서도, 개인 간의 무력도, 너무 한 방향으로 힘을 실어주다보니 분명 가장 강대한 제국과의 전쟁임에도 불구, 가우리가 압도적으로 승리하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정리하자면, 강철의 열제는 처녀작이라는 걸 감안했을 때, 극초반부를 제외하면 문체나 스토리, 그리고 캐릭터 면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러한 요소들이 극대화되어 개문산성 공방전에서는 정말 멋진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상대적으로 후반부가 부실하여 아쉬움이 남는 소설이다.
  • ㅎㅎㅎ 2012.01.05 00:53 ADDR 수정/삭제 답글

    차원이동물 중에서는 상당히 재밌게 읽은 작품입니다. 보통의 차원이동물이 주인공 한명만 이동해서 이세계에서 깽판치는 내용이 대부분임에 반해 이 소설은 군대 단위로 차원이동을 한다는게 좀 특징적이었던것 같네요.

    다만, 작중 을지부루인가 그 난쟁이 형제들이 구사하는 심한 북쪽 억양들은 심히 듣기 괴롭더군요 어차피 이 소설 읽을 사람들은 99% 남한 사람들 뿐이고, 실제 고구려 시대 사람들 말투가 그랬는지도 모르는 판에 그냥 표준어로 적었으면 됐을걸 작가의 무리수라고 봅니다.

    • 성외래객 2012.01.06 22:29 신고 수정/삭제

      저도 처음에는 약간의 선입견을 가지고 봤다가 생각보다 괜찮게 본 작품입니다.

      음 사투리의 경우는 저 역시 처음에는 상당히 거슬리더군요. 위에 언급한 것처럼 강철의 열제 초반부에는 작가가 억지로 캐릭터들에게 개성을 입히려하는 게 노골적으로 드러나는데 그 중 하나가 을지형제가 사용하는 사투리로 보였거든요. 그래서 독특하긴 한데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싶었는데 캐릭터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나서부터는 아주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괜찮은 시도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특히, 개문산성 공방전 쯤해서는 을지 형제의 캐릭터성을 돋보이게 하는 장치로써 나름대로 잘 활용된 것 같습니다ㅎㅎ

  • 바람 2013.03.09 17:29 ADDR 수정/삭제 답글

    음... 지금 현재 7권쯤 읽는중인데, 여기저기 둘러봐도 이해가 안되는게... 7권에서 '리셀에게 들은 고대인의 이야기'라는 식으로 주인공이 언급하는데... 이 언급이 없더군요. 텍본에서 보니까 2권에서 리셀이 고대인의 '배덕의 계절'에 대해 언급하던데, 문제는 같은부분의 출간본에서는 그냥 '신의 자손'의 모순점같은것만 지적하고 넘어가더군요. 대체 언제 리셀에게 들은건지...; 아무리 뒤져봐도 출간본에서는 보이질않는데 대체 뭔지 orz... 작가님의 오류인지, 아니면 제가 못본건지...

    • 성외래객 2013.03.10 12:42 신고 수정/삭제

      제가 연재분을 보지는 않았던 지라 말씀하신 부분이 정확하게 어떤 부분을 이야기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연재분에서 등장했던 부분이 출간분에서 등장하지 않았다면 내용 전개상 불필요한 부분이라 판단되어 제외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네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