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램프

                        
                         얼음램프 1
                        8점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고 봤다가 의외의 수작을 발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경우 대체로 별 기대를 안 하고 봤기에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얻게 되는데 내게는 얼음램프가 그런 작품이었다.

말년 휴가 출발까지 5일 정도 남았을 무렵.

이 쯤되면 대개의 말년병장은 그동안 하던 모든 것에 집중을 못하고 그저 시간을 빨리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마련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로 어떻게든 시간을 보낼 방법을 찾다가 그전까지는 신경도 안 쓰고 있던 얼음램프라는 책을 보기 시작했다.

그 때까지 얼음램프에 대한 나의 인상은 '그저그런 양판소' 정도였기에.

그러다 점차 이게 그저 그런 양판소가 아니라는 인상을 여러 곳에서 받기 시작했고 5권에 이르러서는 내가 크나큰 착각에 빠져있었음을 깨달았다.

얼음램프는 그저 그런 양판소와는 궤를 달리하는 작품이었기에.

기라 소유.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신전에서 살고 있던 이 어린 소녀는 열네살이 되면 신전을 떠나야하는 법도에 의해 한 대공가의 시종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어릴 때부터 남자아이처럼 키워져서 잘 몰랐지만 본인은 여자였던 것.

그러다 어떤 초월적 존재와의 계약을 통해 남자의 목소리를 얻게 된 기라는 그 이후로 가슴을 천으로 동여매고 남장여자로서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단순히 이 정도에 그쳤더라면 얼음램프는 그저그런 양판소들 중 하나에 그쳤을 것이다.

솔직히 1권까지만 하더라도 작가의 미숙함이 여기저기 눈에 띄는지라 인물들의 개성이라던가 몰입감이 그렇게까지는 높지 않았다. 그저 볼만한 정도의 작품 정도로 느껴졌다.

그러던 것이 내용이 진행되면서 캐릭터들의 개성이 자리잡기 시작하고 어디선가 본 듯한 세계관이지만 그 안에 달의 힘에서 촉발된 작가 고유의 설정이 녹아들면서 이야기는 슬슬 본궤도에 올라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때부터 독자는 이야기 속에 빠져드는 자신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정말로 안타깝게도 얼음램프는 비운의 작품의 전형적인 루트를 타고 만다. 4권까지 읽다보면 지금까지 풀어놓은 이야기들로 봤을 때 절대 5권에서는 완결이 무리라는 걸 알 수 있는데 역시나다를까 5권은 1부 완결의 형태로 이야기를 마무리짓는다.

더욱이 독자를 미치게 만드는 건 작가가 5권에서 1부 완결을 내야하자 '내 독자를 미치게 만들어주지.'라고 다짐이라도 했는지 5권에서 그야말로 폭풍전개를 보여준다.

문제는 떡밥을 회수하는게 아니라 그 떡밥을 있는대로 키워놓은다음 이야기가 끝난다는 점(...)

으아...작가 나랑 지금 싸우자는 거지!!!

이후의 이야기가 미칠 듯이 궁금해서 나오자마자 얼음램프 2부에 대한 정보를 찾아봤는데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가 않았다. 1부 완결 이후 5년이 지난 현재까지 2부는 나오지 않았다ㅡ.ㅡ

그럴 수 밖에 없기도 한게 얼음램프는 작가의 사정으로 연재가 중단된게 아니라 어른의 사정으로 중단된 케이스이기에;;

얼음램프의 판매량이 부진한 건 개인적으로 상당히 안타깝다. 그렇게 어려운 작품도 아니고 1,2권의 몰입감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아마 문제는 잘못된 광고가 아닐까 생각된다.

얼음램프의 뒷표지 광고만 보자면 정말 전형적인 양판소로만 보이기에 수준있는 작품을 원하는 독자들에게 외면. 그리고 그저그런 양판소의 팬들이 봤을 때는 양판소와는 질적으로 다른 작품이기에 외면.

결국 서로 성향이 다른 두 개의 독자층에게서 전부 외면받는 경우가 되어버렸달까...

작가는 이후 다른 작품을 내긴 했지만 두번째 작품 이후는 집필활동을 접었는지 후속작에 대한 정보가 없다; 참 안타깝기 짝이 없다.

솔직히 말해 얼음램프를 명작이라 칭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지만 수작이라 불릴 정도의 작품은 된다 생각한다. 더군다나 이 작품이 작가의 처녀작이라는 걸 고려하면 향후 나올 작품에 대한 기대감은 더욱 높아진다.

그러나 결국 두번째 작품을 끝으로 집필활동은 중단.

현실적으로 이 작품의 2부가 나오는건 힘들어보이지만 그래도 언젠가 기라가 다시 일어나 그토록 바라던 행복을 쟁취하는 모습을 꼭 보고 싶다.